2026.04.07 (Tue) KOREA Edition

문화&여행

세계적 거장의 고백 "전시 준비 내내 캄캄하고 절망했다"

기사입력 2026-04-06 17:53

 세계적인 '숯의 작가' 이배가 자신의 30여 년 예술 여정을 총망라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예술적 근원을 되짚는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작가 스스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과정의 결과물이다.

 

전시의 제목 '앙 아탕당(기다리며)'은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염원하는 작가의 겸허한 고백을 담고 있다.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그는 "스스로 예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되돌아봤다"며,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절망적이고 캄캄한 심정이었다고 토로했다. 이 불안과 결핍의 감정이 역설적으로 '기다림'이라는 주제를 낳은 것이다.

 


작가의 고뇌와 달리, 전시 공간은 관람객을 압도하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미술관 입구에서는 높이 8미터, 무게 7톤에 달하는 거대한 숯 기둥 '불로부터'가 관람객을 맞는다. 이는 정화와 치유의 상징으로, 대규모 산불과 같은 자연재해로부터의 회복을 염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야외 '무의 공간'에는 주변 산세와 건축물과 조응하도록 설계된 10미터 높이의 브론즈 조각 '붓질' 연작이 설치되어 자연과 예술이 하나 되는 풍경을 연출한다.

 

전시장 내부는 빛을 품은 흑과 백의 공간으로 나뉜다. 순백의 '화이트' 공간에서는 멀리서 보면 담백한 붓질처럼 보이는 작품이 가까이 다가서면 3만 5천여 개의 스테이플러 심으로 이루어진 집합체임이 드러난다. 이는 비물질적인 선의 이미지와 철이라는 물질성이 만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반대로 '블랙' 공간은 다양한 종류의 나무(잣나무, 포도나무 등)로 만든 숯 덩어리들을 쌓아 올려, 단일한 검은색 이면에 존재하는 다채로운 근원의 숲을 형상화했다.

 


작가의 정체성은 고향 청도에서 가져온 흙으로 조성한 '논'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농부의 아들로 자란 그는 싸리 빗자루를 들고 논바닥을 휘저으며 땅에 거대한 붓질을 남기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전시 기간 동안 이 논에서는 실제 식물이 자라고 소멸하는 과정을 거치며, 땅과 인간, 시간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1989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숯'이라는 단일한 재료에 천착해 온 이배 작가는 모든 것이 타버린 재앙의 현장에서도 생명이 움트는 경이로움을 이야기한다. 농부가 땅을 일구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기도하듯, 이번 전시는 예술가로서의 치열한 탐구 끝에 도달한, 생명과 순환에 대한 깊은 경외와 기다림의 미학을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기사인쇄 | 안연진 기자 ahnahn33@bridgetoday.net